대구·경북 통합해서 제2도시 되면 뭐하나? 지역통합은 중앙집권, 독재, 전체주의로의 길 터 (사진출처: 동대구역사 안에 설치된 전광판 광고)
조선일보가 ‘캐나다 기업이 강원도 텅스텐 광산 채굴하게 된 현실을 보며’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상동광산을 소유한 캐나다 회사 알몬티가 1000억 원을 투자해 강원도 영월군에 텅스텐 가공 공장을 짓고 텅스텐을 생산해 미국에 수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상동광산은 세계 최대 규모의 텅스텐 광산 중 하나이며, 그 경제적 가치가 60조 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고 한다.(조선일보, 2024.8.25.)
조선일보는 우리 땅의 광산을 캐나다 회사 알몬티가 채굴하게 된 안타까움을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를 ‘적폐’로 몰았기 때문, 혹은 정쟁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 자원외교를 ‘적폐로 몰아’ 수사한 것을 ‘광물 자산을 외국에 헐값에 판’ 사실과 관련지우고, 또 이런 사실 등을 “정치에 정신이 팔려 이성을 잃은 것”, “어설픈 정치 논리로 정쟁의 도구”가 된 것으로 규정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문재인 정부를 겨냥하여, “정부는 해외 자원 개발 사업을 다시 검찰에 수사 의뢰하고 확보한 해외 광물 자산을 외국에 헐값에 팔았다. 정치에 정신이 팔려 이성을 잃은 것이다”, “해외 자원 개발이 국내 정쟁의 도구로 10년 뒷걸음질 친 사이, 글로벌 자원 경쟁은 한층 격화됐다. 해외 자원 개발은 탐사부터 생산까지 수십 년이 걸린다. 성공하면 엄청난 이익이 나지만 실패할 확률도 매우 높다. 어설픈 정치 논리로 정쟁의 도구가 된 해외 자원 투자를 앞으로 어떤 정부가 장기적 안목으로, 높은 실패율도 감수하고 다시 추진할 수 있을까 새삼 생각하게 된다” 등 토를 달았다.
조선일보의 이 같은 논리로부터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탐사부터 생산까지 수십 년이 걸리는 해외 자원개발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지만, 혹여 성공해서 거둘 엄청난 이익을 고려하여, 그 실패율을 감수하라고 주창하는 것이다. 그것도 장기적 안목으로 수십 년을 헛손질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조선일보의 이 같은 논조는 수십 년 동안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은 ‘로또’에 장기적으로 수십 년 투자하고 있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캐나다 알몬토 회사의 상동 텅스텐 광산 개발은 로또같이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경우가 아니다. 수익 날 전망이 없었다면 개발에 착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성공의 확률을 염두에 두고 한다. 조선일보도 지적하고 있듯이,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반도체 등에 사용되는 텅스텐 수요가 늘자 텅스텐 국제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를 실패로 귀결된 이명박의 자원외교와 비교할 일이 아니다. 이명박의 실패는 그 자체로서 성공 확률이 없는데도 막무가내 투자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품질도 좋고 추정 매장량이 현재 우리나라 연간 텅스텐 수입량의 7200배에 달하는 상동광산은 중국산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려 폐광됐다. 그러나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반도체 등에 사용되는 텅스텐 수요가 늘자 텅스텐 국제 가격이 급등했다. 세계 텅스텐 시장의 80%를 차지해 온 중국산 텅스텐이 곧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한다.
둘째, 조선일보는 이명박 자원외교를 ‘적폐’로 몰고 장기적 안목을 결여한 것이 박근혜, 문재인 정부라고 보았으나, 반드시 정부가 모든 것을 주관하거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상동광산의 경우, 원래 대한석유 소유였다가, 나중에 개인으로 소유자가 바뀌고, 적자에 허덕이자, 그것을 캐나다 회사에 팔아넘겼다. 개인이 팔아넘긴 것을 두고, 문재인 정부를 욕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월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잘하든 잘못하든, 개인의 경제 행위는 국가가 간여하거나 책임질 일이 아니다.
셋째, 조선일보는, 한편에, “긴 안목의 장기 투자”를 앞세우고 이명박 자원외교를 옹호하면서, 다른 한편에 합리적 평가 과정의 담론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30년 만에 재채굴되는 상동광산은 자원 개발을 긴 안목에서 투자하고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들어 이명박 정부 자원 외교를 ‘적폐’로 몰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국정감사, 감사원 특별 감사, 대대적인 검찰 수사”를 받았고, “당시 공기업 사장 등이 재판에 넘겨졌지만 전부 무죄”, “애꿎은 기업인이 극단 선택을 하는 비극까지 낳았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논리에 따르면, 이명박 자원외교는 그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고, 공기업 사장등은 애초에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 감사, 수사 등을 받았고, 기업인이 극단 선택(자살) 하는 것은 언제나 ‘애궂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자원외교’의 이름으로 정부나 기업인이 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타당성 여부를 막론하고, 무조건 ‘장기적 안목’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은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혹여 ‘로또(투기)’같이 성공할 때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조선일보의 논조는 현재 진행중에 있는 정부의 ‘대왕고래’ 석유시추사업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대왕고래에 사암층 존재"…전문가들 "꾸준한 시추 시도가 성공 조건”’(조선일보, 2024.8.19.)이라는 기사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장은 석유가 날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암층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석유가 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아닌데도, 정부는 서둘러 작업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또 “꾸준한 시추가 성공 조건”이라는 말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실패할 확률이 많더라도, ‘로또(투기)’ 같이, 혹여 성공했을 때 얻을 막대한 이익을 바라서 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조선일보는 ‘장기적 안목’의 ‘로또’ 논리를 캐나타 회사 알몬티의 상동광산 개발 사례에서 이끌어냈으나, 양자간에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알몬티의 상동광산 개발은 장기적이었지만, ‘로또’ 논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광산을 헐값에 사두었다가, 시세가 오르자 투자한 것 뿐이다. 투자하지 않은 장기간의 기다림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고, 이명박 자원외교 같이 막무가내 돈부터 넣고 대책 없이 기다리는 것과는 상반된 것이다.
알몬티는 정부 권력이 주도하는 회사가 아니다. 경제적 타당성을 먼저 분석한 다음, 개발 정책을 구체화하고 실행한다. 한국 ‘대왕고래’ 사업 같이, 정부가 주도하여 먼저 예산 편성하고 난 다음에, 학회에서 뒤늦게 그 성공을 ‘기대’하고, 가능성을 ‘높게 평가’ 함으로써 정당성을 더해갔던 것이 아니다. '2024 세계지질과학총회(IGC)' 동해 울릉분지 탐사 특별세션 패널 토론(부산 벡스코, 2024.8.29.)에서, “국내외 석유 시추 전문가들이 8광구와 6-1광구 북부에 걸쳐 있는 대왕고래 유망구조에 ‘저류층’이 있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며 탐사 시추가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 바로 그 같이 선후가 뒤바뀐 사례이다.
조선일보가 외국기업 알몬티의 상동광산 개발을 두고 문재인 정부 등을 비난하는 것은 단순히 상동 광산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뿌리박은 국가지상주의적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상동광산을 알몬티에게 팔아넘긴 것은 정부가 아니라 개인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한편으로 실패한 이명박 자원외교, 뿐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대왕고래’ 정부의 기약없는 시추사업을 정당화하는 것은 개인 기업의 재량권을 무시한 처사이다.
개인이 사유재산을 팔아넘긴 행위가 왜 이명박 자원외교의 실패의 원인을 정쟁 때문으로 몰아붙이고, 기약 없는 정부 차원의 장기 투자를 정당화하고, 기대와 가능성에 편승한 ‘대왕고래’ 시추작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나? 양자 간에 논리적 연관성이 전혀 없다. 이같은 조선일보의 무논리, 얼토당토 않는 임기응변은 국가(정부) 무오류(無誤謬) 지상주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정부 무오류(無誤謬)의 신앙은 조선일보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다. 그 한 예가 의대 증원 관련하여 최근 회자하는 한동훈과 윤석열 간에 벌어지는 이른바, 약속대련일 수도 있는 불협화음의 소극(笑劇 코미디)이다.
윤석열이나 한동훈은 공히 검사출신으로 의료 전문가가 아니다. 그런데 그 윤석열이 변변한 회의록조차 갖추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2,000명 의대 증원 계획을 발표했다. 의사단체나, 환자나,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도 없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국힘당 대표가 된 한동훈이 ‘내사 보고서 작성하듯’ 의대 증원 반대 의견을 작성하여 대통령실에 제안했다고 한다. 의료 관련 문제는 검사가 잘 알 수 없고, 또 정책 방향도 ‘검사가 내사 보고서 작성’하는 방식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의사수 증원 등의 문제는 관련자(의사, 간호사 등 의료직, 지역사회 등)가 모여서 논의를 한다. 그것도 전국에 획일적인 잣대가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이 고유의 권한을 가지고 자체의 필요에 따라 결정권을 갖는다. 전국적으로 일관성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사안을 제외한 다른 영역은 지역에서 고유의 권한을 가지고 결정한다.
의료전문가도 아닌 이들, 행정수장 윤석열과 당대표인 한동훈이 각기 의대 증원 가부를 가지고 다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소극(코미디)이다. 전자는 회의록 조차 변변치 않은 상태에 있다고 하고, 후자는 검사가 ‘내사 보고서 작성하듯’ 의대 증원 반대 의견을 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하다. 사안을 더욱 ‘코믹하게(우습게)’ 만드는 것은 그 한동훈이 대통령실(윤석열)을 향해,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행정부 수장, 아니면 당 대표가 되면, 자신이 주관하여 모든 분야를 통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틀림없다. 자리가 높아지면, 아는 것도 그만큼 많아져서, 의료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권력만능주의적 안하무인의 사고는 이명박, 나아가 실패한 이명박 자원외교 두둔하고 또 성공확률이 낮아도 너무 낮은 ‘대왕고래’ 시추작업을 ‘기대’, ‘가능성’ 운운하며 옹호하는 조선일보가 다 공유하는 것이다. 이명박은 울산 건설회사 출신으로, 자원외교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가 자원외교라는 명분으로 중동 어딘가에 투자할 때, 제대로 된 타당성 조사를 거쳤는지 전혀 불확실하다. 그가 국내에서 추진한 4대강 사업조차도 타당성 조사를 생략한 채, 막무가내 착수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동훈, 윤석열, 이명박, 조선일보보다 더 큰 문제가 바로 국민 민초이다. 한동훈과 대통령실이 의대 증원을 둘러싸고 의견 마찰을 빚는다고 하니, 둘 중에 누가 이기나에만 관심을 갖고 훈수두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국민 민초 자신이 결여하고 있다.
의대 증원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겠다. 다 장단점이 있고, 또 증원의 규모나 속도도 달라질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 관련 주체가 토의를 거쳐서 구체적 장단점을 비교하는 등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일말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논의 주체는 공급자로서의 한정된 이해집단인 의사가 정부와 각기 혹은 서로 연대 작당하여 결정해서도 안 된다. 의료는 공동체의 긴밀한 현안이므로, 지역사회 의견의 광범한 수렴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방안도 대통령실에서 뜬금없이 발상하여 강요하거나, 검사가 ‘수사하는 방식’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집권적인 권력구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이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거칠 것이 없다. 이런 독재, 전체주의는 집권적 구조에서 가능하다. 공산 전체주의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유’로 포장한 전체주의는 한동훈과 윤석열의 월권에 의해 현실화되고 있다.
국민 민초도 여기에 공범으로 발을 넣고 있다. 의대 증원 여부의 결론이 각기 어떤 타당성을 갖는지, 그런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는가 등 과정에 대한 반성, 검토보다는, 의대 증원을 찬성하는 윤석열괴 그에 반대하는 한동훈이 드디어 어떻게 싸우고,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데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국가(정부) 무오류 지상주의는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중앙집권적 구조의 산물이다. 그 집권의 기제는 현재 더욱 가중되고 있는바, 윤석열 정부 들어서 부쩍 가중된 기능적, 지역적 통합의 움직임에서 그러하다.
기능적 통합의 한 예는 윤석열 정부 초기에 진행된 행안부 내 경찰국 신설이다. 지역 자치경찰을 무색하게 만들고, 중앙 부서에서 전체 경찰을 총괄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다. 지역적 집권의 사례는 부울경, 대구·경북, 광주·전남을 통합하려는 시도이다. 지역행정단위는 대단위로 통합될수록, 각 지역민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중앙권력의 획일적 간섭과 통제가 더 수월해진다. 지역통합의 시도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각 지역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윤석열 정부하의 이 같은 권력 통합의 시도는 중앙권력에 의한 획일적 정책의 수립과 적용의 확대를 뜻한다. 기능 및 지역이 통합될수록 윤석열과 한동훈의 도 넘은 독재, 전체주의적 행태는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권력이 집중될수록 권력자의 독선은 더 강화되며, 그만큼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 수렴의 기제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집중이 낳는 부대효과로서의 독재와 전체주의는 윤석열이 말하는 공산전체주의뿐 아니라 윤석열 자신과 한동훈 등에게도 같이 적용된다. 의대 증원 문제를 둘러싼 한동훈-윤석열의 표면적 대립은 양자가 다 한 치의 다름없이, 같은 바탕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한다. 그 표면상의 갈등이 약속대련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의대 증원 찬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에서 동일하다.
문제는 야당 민주당도 그 민초의 눈높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초는 한동훈과 윤석열 사이에 정작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점에서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것이고, 또 야당은 국힘당, 윤석열, 한동훈과 똑같이 권력지향적일 뿐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하루가 멀다 하고, “‘더 큰 원 팀(뭉치기)’만이 민생 회복을 향한 국민 명령을 받드는 길”이라고 한다. ‘큰 원 팀’이란 똘똘 뭉치자는 말이다. 문제는 민주당만 뭉치는 것이 아니라, 국힘당도 뭉친다. 친일파와 귀화 일본인이 똘똘 뭉치고, 국힘당이 똘똘 뭉치고, 태극기 부대가 똘똘 뭉쳐 뭐든 한다. 그러니 ‘원 팀’은 ‘더 큰 원 팀’으로 만든다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주체들에 따른 대립각만 더 조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