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힘(권력)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민의회의 합리성, 전문성 담론은 하릴없다
시민이 형식상 정당소속이 아니어도 정당 선호도를 가지며, 판단 오류도 불가피
시민 ’의회‘는 국민개헌발의, 국민소환, 국민투표의 대체제가 아니다
심의를 중시하는 시민의회는 중우(衆愚)를 전제하고 다수결 민주원칙 부정하는 것
평등하게 어리석은 시민들의 시민의회가 장고(長考) 끝에 악수 둘 수도
시민의회와 국회는 똑같이 집권 아닌 지역분권의 권력구조에서 원활하게 작동
권력 집중에 따른 갈등의 심화는 시민의회라고 예외 아니다
거대 양당의 갈등으로 식물국회가 연출되면서, 국회를 보완하는 장치로서 ’시민의회‘ 담론이 전개되고 있다. 시민의회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이든 의원이든 대리인을 뽑았더니, 이들이 자기 이익을 앞세우고 주인인 국민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이 딜레마는 주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는 절대 극복할 수 없고, 대리인들이 착하고 일을 잘하더라도 그들을 좀더 다그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잘못할 때에는 즉각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민의회 담론의 주요 취지이다.(녹색평론, 154호[2017]. 곽노현/오현철/이지문/이진순/김종철, 시민의회를 생각한다, 오현철 발언)
그런데 이 같은 취지에 두 가지 모순이 내재한다. 첫째, 시민의회가 대통령, 의원 등 대리인을 다그치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어떻게 어느 정도로 다그칠 수 있는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시민의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의회는 ’의회‘에 불과할 뿐, 사법적 수사권 혹은 징벌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 ‘다그치는 것’은 강제력, 실효성 없는 자문에 불과하고, 급기야 ‘들러리’로 전락하기가 십상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시민의회가 보완적 기구로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행정권, 혹은 국회의 입법권을 상회해야 한다. 원론은 물론 현실적으로도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둘째, 시민의회 자체가 범할 오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시민의회의 구성을 어떤 방식으로 하든, 인간이 범하는 실수, 판단의 오류는 피해갈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시민의회는 현재의 국회를 꼭 닮았다. 국회에서처럼 무엇을 하든, 적어도 현재로서, 시민(국민 민초)이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악의든 선의든, 권력을 탐하든 마음을 비우든,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판단의 실수는 불가피하고, 그런 점에서 국회와 시민의회는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 잘못된 것은 검증, 견제, 징벌의 장치를 통해서 고쳐나갈 수밖에 없는데도, 두 기구는 그런 장치를 결여한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입지해 있다.
시민의회가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이들로 구성된다 해도, 추첨이라는 구성방법이 그 결정의 무흠결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가진 어쩔 수 없는 아집과 편견이 최상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그런 인간적 속성은 정당 소속 여부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무작위 추첨으로 시민을 뽑은 시민의회를 ‘소우주’에 비긴다거나. 대한민국 5천만 명의 국민을 딱 한 501명으로 추리되, 성별, 연령별, 지역별로 ‘완벽하게’ 뽑아놓으면, 그 토론이 5천만 명이 한자리에서 벌인 토론과 같은 것이라 치자. 성별, 연령별, 지역별로 뽑는다는 것이 ‘완벽’을 보증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토론이 5천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해도, 그것이 입법·사법·행정 등 제도적 권력을 견제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견제는 의회에서 심의를 거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국민소환, 국민투표 등, 견제를 가능케 할 제도적 장치가 따로 마련됨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서 시민의회의 심의가 국민소환, 국민투표 등 권력 견제 제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같은 권력견제 장치는 의회의 심의 기능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시민의회 담론은 중우(衆愚)의 개념을 전제하고, 또 다수결의 민주적 원칙을 부정한다. 국민이 직접 나서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국민발안, 국민투표, 국민소환 모두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에는) 시민들이 모여서 심의하는 과정이 없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녹색평론, 위의 책, 이지문 발언),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토의과정을 거치면 전문성이 높아진다”(녹색평론, 위의 책, 오현철 발언), “시민의회는 여론조사와 동일한 방식으로 국민을 쏙 닮은 ‘미니’국민집단을 만들어서 국민 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이지만, 그 ‘미니’국민들에게 상이한 입장을 가진 최고수준의 전문가들을 붙여서 집단학습과 숙의 과정을 제공함으로써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국민의사가 아니라 집단지성으로 다듬어진 국민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여론조사와 구별된다”(민들레, 곽노현, 시민의회①상) 등 취지의 발언이 그러하다.
오현철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전문 비평가가 쓴 비평 하나랑, 시민 100명이 쓴 100개의 비평을 모은 것이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또 한 명이 와서 요리하는 거랑, 파티에 참석한 100명이 각기 자기 요리를 갖고 와서 하는 거랑 어느 쪽이 더 좋은지를 비교하고, 이른바 집합 지성 쪽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낸다. 개개인 시민이 요리 전문가 한 사람보다는 전문성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시민 다수가 모여서 지혜를 모으면 전문가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리스토테렐스의 이런 말이 시민‘의회’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냥 소수보다 다수의 뜻을 모으는 것이 낫다는 뜻일 뿐, 중우의 전제나 심의의 필요성을 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냥 다 모여서 결정하자는 것이다.
시민의회 담론에서는 정당 등 기득권 구조와 무관한 시민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결정하자고 한다. 예를 들면, 소선거구제 방식을 계속 지키고 있는 것까지 정말 큰 문제이며 기존의 카르텔 정당들이 선거법, 관련 정당법 모든 법률 개정을 막고 있으니, 시민들이 참여해서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정당법, 선거법부터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 구조와 무관한 시민은 드물다. 설사 있다 한들 그들의 결정이 최선이라는 보장이 없다. 선의가 최선의 결과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수의 뜻을 모으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은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뜻이지, 숙의 혹은 전문가 의견 등 여과 장치를 거친 의회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 서울시교육감 곽노현에 따르면, 시민의회의 방식은 ① 여론조사의 즉흥성이나 통념성에서 자유롭고, ② 선거의회의 진영논리와 당리당략 및 선출의원의 재선 욕망과 부패 유혹에서 자유로우며, ③ 국민투표의 찬반적합성 요건과 찬반대립갈등에서 자유롭고, ④ 헌법재판소의 법조 엘리트주의와 사건성에서 자유로우며, ⑤ 전문가집단의 그룹사고와 이론편향에서 자유로우며, ⑥시민의회 방식은 활동가집단의 이상주의나 운동 논리에서도 자유롭다고 한다.(2023.3.29. 시민의회 ①하)
이어서, 시민의회는 집단지성으로 깨어난 국민의 뜻이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정부와 의회에 알려주고, 또 그에 대한 존중과 수용을 촉구하는 민주적 제도형식이라는 점에서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고 곽노현은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장점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시민의회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시민의회에서 도출한다고 그 결론에서 반드시 무흠결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회 참석자를 포함하여 아무도 즉흥성, 통념성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기 때문이다. 심의를 오래하고 장고(長考)할수록, 더 비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장고 끝에 악수 두는 것이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시민의회 담론은 기본부터가 허황하다. 진영논리, 당리당략의 개입이 아니라도, 개인은 누구도 각각의 편견과 아집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둘째, 아무리 좋은 결론을 낸다 하더라도, 견제 감독 장치 없이, 숙의를 통한 제안만으로는 충분하지 못 하다는 문제가 있다. 곽노현이 실토하듯이, “그(시민의회 제안)에 대한 존중과 수용을 촉구”하는 것에 그친다. ‘촉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강제성이 없다. 또 일각에서는 권력의 총량이 커짐에 따른 대응체제의 필요성을 말하고, 3권분립이 아니라 (시민의회 권력을 포함하여) 4권분립의 시대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론이나 법을 어겼을 때, 견제 및 징벌 장치가 없는 한, 권력은 통제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민의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릴없이 무능하다.
판사가 대놓고 위법 판결하여 개인의 신세를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시점에, 시민의회로는 시민들이 느끼는 불합리가 감당이 안 된다. 한 예로, 대법원 판결을 서울고등법원(판사 김민×)이 거꾸로 뒤집자, 이 사실을 대법원에 재상고했더니, 대법관들이 재상고 이유를 재구성(변조)하여 각하한 사실이 있었다. 대법원 판결은 하위 법원이 뒤집지 못 하도록 되어 있는바, 피해자는 이런 사실로서 “민사소송법 제436조 제2항에 위반”한 것으로 재상고 이유를 기재했다. 그런데 대법원에서는 엉뚱하게도 “증거의 취사선택과 사실의 인정을 탓하는 취지에 불과”하다고 상고 이유를 바꾸어 적으면서, 정작 상고 이유로 제출한 “민사소송법 제436조 제2항에 위반”한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고 판단하지 않았다.
대법원 재상고는 물론 이에 대한 재심에서도 그 같은 상고 이유의 재구성(변조)은 시정되지 않았고, 결국 상고 이유에 대한 왜곡으로 득을 본 것은 원고(삼성)측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재구성(변조) 과정에서의 대법원 주심이 이번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조희대였다고 한다.
<뉴탐사>에서는, 조희대 대법원장 임명을 앞두고 검증 차원에서, “[숏탐사]고등법원 판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인생은 나락으로”라는 표제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보도 전 뉴탐사에서는 고등법원 판사 김민×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사실 여부를 질문했다.(2023.12.2.) 놀랍게도 김민× 판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확인해보시라는 뉴탐사의 요청에, 자신은 그 사건을 다시 찾아 확인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대답했고, 다시는 뉴탐사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도 천명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반성해보게 된다. 첫째, 판사가 자신의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그런 사실의 여부를 전혀 확인조차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설사 그런 잘못된 판결한 사실이 있다 한들, 판사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가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증한다. 둘째, 대볍원에서 조희대가 주심이 되어, 상고이유를 재구성(변조)하고 시민에게 피해를 끼친 사실이 있다 해도, 이는 그가 대법원장으로 임명되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판사가 재판을 잘못했다는 주장이 나와도, 해당 판사 개인은 물론 국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재고나 검증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판사의 잘못된 판결이 판사 자신의 거취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이런 사회적 환경은 판사의 권력 오·남용이 보편화된 현실을 드러낼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 같은 오남용을 조장하는 촉매가 된다.
이런 사례는 권력의 오·남용 여부에 관련한 것일 뿐, 시민의회가 추구하는바, 중우를 지양하고 ‘심의’를 도모하자는 시민의 이상과 동떨어진 것이다.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목도하는 검찰, 경찰은 물론 판사의 전횡은, 시민의회가 추구하는 바의 ‘심의(숙고)’와는 딴 세계의 일이다. 공직자의 거짓, 탐욕, 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에 상응하는 힘(권력)을 가짐으로써 가능한 것일 뿐이다. 직접적인 견제와 힘으로 징벌하는 맞대응 절차를 마련하지 않고는 권력과 관련한 사회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해외 유럽 선진국에서는 시민의회의 사례가 많다고들 한다. 캐나다, 아일랜드, 아이슬랜드, 벨기에 등등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민의회에서는 서로 상호 큰 갈등 없이 원만하게 합의에 이르곤 한단다.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다. 이들 나라는 중앙의 대통령이나 의회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집권적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중앙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도 않고, 각 지역이 다소간 독립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결정의 기제가 각기 분산되어 있다. 중앙의 권력이 최소화된 상황에서, 중앙이 소관하는 바에 대해 크게 충돌할 소지 자체가 많지 않다.
서구의 시민의회가 원만하게 운용된 것은, 그들 시민의회가 도출한 심의나 결정 자체가 합리적이라기보다, 그 결정이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은 권력 구조적 환경 때문일 소지가 크다. 그와 달리 한국의 중앙집권적 구조에서는 국회 혹은 시민의회를 막론하고 그 결정에 따른 이해관계 자체가 치명적이다. 합리성과 무관하게 이것이 영향 미치는 손익의 이해관계가 크기 때문에 갈등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시민의회 담론에서는 300명의 국회의원같이 시민의회 의원도 300명을 뽑자고 한다. 그래서 국회를 견제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구조적으로 국회와 속성을 같이 하는 시민의회는 지금 식물 국회 같은 기구를 하나 더 만들어 번거로움만 더할 뿐,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존재로 전락할 소지가 없지 않다.
그렇다면, 시민의회를 따로 만들 것이 아니라, 혹은 만든다 하더라도, 현재 국회의 기능을 각 지역으로 분산하여 국회의 기능 자체를 축소할 필요가 있다. 중앙 국회의 권력을 그대로 두고, 수만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더구나 국회의원이 개인적으로 누리는 특권은 권력구조적인 것이 아니다. 그 개인적 특권을 줄일 것이니 그 대신 의원수를 늘려야 한다는 논리는 근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개인적 특권이 300가지 아니라 천 가지라 한들, 그것은 권력구조적 문제와 무관하다. 개혁의 핵심은 의원 개인이 누리는 특권이라기보다, 국회가 가진 비대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축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중앙 국회의 권력이 축소되면, 그 의원들이 누리는 특혜는 같이 줄어들게 되어 있다. 국회가 과도하게 독점하고 있는 중앙의 권력이 온갖 적폐의 원흉이 되는 것이고, 의원이 개인적으로 누리는 특혜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시민의회가 작동하는 경우에도, 그 시민의회는 중앙에만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각 지역에도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시민의회가 다단계로 만들어져야 한다. 행정, 입법, 사법을 막론하고 중앙의 권력을 각 지역으로 분산하지 않는 한, 권력은 독재화하게 마련이다. 집중된 권력은 식민지배와 독재정치의 잔재이다. 이 같은 전통의 비민주적 구조하에서는 시민의회도 민주적으로 작동할 수 없음에서 예외가 아니다.
중앙집권의 폐해는 3권의 정부기관에서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각계각층에서 한결같이 고질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의료계가 그 한 예이다. 18년간 의대 증원을 제자리에 묶어놓고도 여전히 증원에 반대함으로써 의사들은 의료과실을 둘러싼 환자와의 관계에서도 더더욱 ‘갑질’이 가능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가능한 한 의료정보는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전문가인 환자에게 입증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현실 또한 그러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전, 입증책임을 의사들에게로 전환하는 입법안이 장고 끝에 마련되었으나, 이명박이 이를 무산시키고, 그 대신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이 기관은 지방에는 아예 없고, 서울에 딱 한 군데 있어 중재와 조정을 독점하고 있다. 이 같은 독과점 체제는 의사들의 ‘로비’ 창구로 쉬 이용될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서, 전문지식 및 정보를 구하지 못하는 다수 환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불이익을 감수하고 조정 혹은 중재에 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 입법안에는 지역에 지점을 둘 수 있도록 했으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기관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불리한 입장의 환자를 두고, 의사들은 여전히 의료과실에 대한 면책의 형사 특례를 요구하고 있다. 의료과실은 의사측 책임보험제도를 통해 환자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보험의 경제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형사특례의 특권 계급을 지향하는 의사들은 헌법 제11조 제2항(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않는다)을 위반하고 있다.
정부의 3권은 물론 각계 집단들이 집권적 구조 속에서 집단 이기주의를 실천하는 마당이다. 이처럼 후안무치한 오늘 한국의 병폐는 시민의회로 고쳐질 것이 아니다. 그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권력 분산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시민의회가 아니라 국민 민초가 직접 나서야 한다.
검사, 경찰, 판사의 권력 오남용에 대한 시민의 견제는 각 지역 검사장, 경찰청장, 법원장을 민선으로 돌려 그들을 쉬 소환할 수 있도록 소환제도의 문턱(발의 서명인 비율 경감 및 33% 유효투표제율 폐기)을 낮추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부와 의료계는 권력을 민주적으로 분산하는 데 앞장서기 위해 정부와 의료계 등 각 분야의 정보를 가능한 한 널리 개방해야 한다. 전국정당뿐 아니라 지역 정당도 허용되어야 하고, 국회뿐 아니라 지역 의회도 활성화되어야 하겠다.
무작위 선발 방식으로 국회의원과 동수인 300명을 뽑자고 하는 시민의회(시사인, 2017.04.20.)는 국회와 똑같은 속성의 대의 회의체일 뿐, 권력의 해묵은 오남용 관행은 시민의회 제도로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차제에, 시민 민초가 중우의 존재로 매도당하고, 숙의(심의)‘하도록 요구받고 있을 것이 아니다. 후안무치한 비리의 공직자를 민초가 나서서 견제, 감독, 징벌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고로 세 가지 점을 덧붙인다. 첫째, 직접민주와 대의민주는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의제가 반드시 민주가 아닐뿐더러, 직접민주와 대의제는 따로 가는 것이 아니다. 대의제를 원용하되, 그 대의제가 대의하는 소수의 과두정체로 흐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국민 민초가 직접 그들의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직접민주이다. 그 주요 요소가 국민발안, 국민투표, 국민소환로 구성되는 것이다.
둘째, “시민 배심재판”의 필요성, 정치 천민으로 전락한 50만 교사 및 100만 공무원의 정치기본권 회복 등은 시민의회 담론과 무관하다. 이 모든 민주적 개선 방안을 시민의회와 관련있는 것으로 섞으면 안 된다.
셋째, “지금 사법부의 모순은 근본적으로는 대법원장이 법관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등 대법원장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므로, “시민들이 참여해서 인사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서 법관 인사편성”을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녹색평론, 위의 글, 오현철 발언] 그러나 이 제안에는 다시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시민들이 법관을 뽑는다고 해서 그 법관이 반드시 잘 판결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그래서 그 법관의 잘못된 판결에 대한 효과적 견제, 징벌 장치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시민의회가 예를 들어 국회와 같은 300명의 집권적 구조로 존재한다면, 국회와 같은 독선과 비리의 기구로 전락하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문제의 관건은 ’시민 의회‘가 아니라, 획일적 인선이 되지 못 하도록 각 지역별로 법원, 검찰, 경찰을 별개의 독립단위로 하고, 그 기관장은 민선하게 하는 것이다. 그 선출에는 시민의회의 대의기구가 아니라 시민 민초가 총체적으로 함께 참가하는 것이 된다.
현실적으로 욕심(탐욕)과 힘(권력)의 관계차원에서 결론이 도출되는 상황에서, 시민의회가 갖는 합리성, 전문성을 논하고 있을 개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