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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영의 금요칼럼]국회무용론⑭ 위정자의 ‘리더십’과 의원내각제에 목매는 이들의 눈에 지역분권이 안 보여

최자영 | 입력 : 2024/01/07 [19:13]

독일의 안정은 의원내각제 때문이라기보다 지역 분권에 기인한 것
35년 스웨덴 거주 최연혁의 ‘지도자와 추종자’론은 지역 분권 구조를 백안시
최연혁의 ‘헌법과 법치’ 지배론은 윤석열의 복사판
봉건적 지역할거 전통의 일본은 민주적 지역 분권의 나라
일본 ‘마이너스 금리’, 자본의 불로소득 최소화 및 노동 가치 존중
김포시 서울 편입론은 박정희 독재의 중앙집권, 획일적 행정구획 강제의 전통

스웨덴 린네대학 교수 최연혁이 35년 스웨덴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서 서울콜로키움 정치학교 교장을 맡는다고 한다. 이 정치학교는 무소속 의원 양향자 등이 주도하여 지난 8.27일 창당한 ‘한국의희망’당 산하 기관이다. 북유럽식 정치제도와 시스템 전문가라고 하는 최연혁은 한국의희망 창당 준비를 도왔고, 한국의희망 정책연구소장을 겸직하고 있다고 한다.(신동아, 2023.10.31.)

최연혁은 “특권을 바라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사람, 대한민국을 세계 선도국가로 도약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학교”, “리더십(지도자)과 팔로어십(추종자)”, “지도자(리더)가 추종자(팔로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 유지나 팽창을 위한 일에 천착하면 국가와 국민을 잘못 이끌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현 갈등 구조와 사회문제의 가장 핵심적 원인은 리더십을 제대로 훈련받은 준비된 지도자가 없다는 데 있다. 정치가 4류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등 취지의 발언을 했다.

최연혁은 정치의 핵심이 지도자와 추종자 간 관계라고 주창하고 있다. 스웨덴에서 35년을 살았다고 하는 그가 스웨덴 정치의 정수를 체득한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과문한 필자가 알기로, 스웨덴은 다른 많은 유럽 나라들같이 지역분권을 중시했다. 분권이야말로 나라를 살리고 활력을 불어넣는 길이라고 해서 분권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분권적 구조에서는 획일적 ‘리더십’이 존재하기 어렵고, 한두 명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오히려 시민들 각자가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잘못된 지도자가 나타나지 못 하도록 경계하는 역할을 한다. 지도자가 잘 나서서 추종자(팔로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전한 상식의 시민이 권력지향적 지도자가 전횡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어막이 되는 것이다. 또 유능한 지도자가 나름 무엇을 잘하려 할 때도, 각 지역과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혼자서 독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잘하는 경우에도 지도자가 잘 나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지성에 의한 것이다. 적어도 분권적 권력구조에서는 그러하다.

최연혁은 “대한민국이 처한 갈등과 질곡의 원인이 리더십을 제대로 훈련받은 준비된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원인은, 최연혁 자신이 말하듯, 지도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지속시키고 팽창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같은 권력지향적 지도자는, 개인적 지향성과 별도로, 이미 집권적 권력구조를 전제로 해서 출현 가능하다. 분권적 구조에서는 그런 지도자가 애당초 나타날 수 없다. 분산된 권력을 어떻게 일거에 빼앗아 장악할 수가 있겠나? 현 한국 정치, 사회의 질곡은 훈련된 지도자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과도한 중앙집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연혁은 서로 모순된 개념을 병치한다. 한편에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많이 도와주는 보편적 복지를 선호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에 “국가가 높이 있는 사람을 내려오게 해서 수평을 맞추려고 해선 안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때 최연혁이 말하는 “높이 있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불확실하다. 능력이 자신을 위한 재물 축적이 아니라, 남을 위해 남달리 봉사하도록 한 것이라면, “높이 있는 사람을 끌어내릴”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능력으로 타인이 득을 보고 감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소견에, “수평을 맞추려고 해선 안 된다”는 최연혁의 말은 그 능력 있는 이는 그 능력을 부를 얻는 데 이용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능력 있는 이는 무언가 남달리 불평등하게 많이 가지게 될 것이고, “높이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래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리더십”은 이같은 불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를 위해 봉사는 남달리 가진 특권이나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최연혁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리더십”은 일제 치하 저 밀양의 이회영 일가의 희생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회영 일가는 6형제가 목숨과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털어 넣었다. 남이 그 집안을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의를 위해 자신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최연혁에게는 유보 사항이 또 하나 있다. ‘리더십(지도력)’이 ‘팔로어십(추종력)’을 너무 생각해도 안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리더는 팔로어(추종자) 앞에서 규율과 영을 세워 다소간 권위를 유보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고, 그런 권위를 추락시킨 예로 노무현을 든다. 노무현이 검사들 앞에서 “계급장 떼고 한번 해볼래요?”, “그놈의 헌법이…” 라고 말한 것이 대통령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어서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이 스스로 격을 무너뜨리고, 국가의 근간인 헌법을 무시했다”, “헌법을 무시하는 순간 법치는 끝나는 것이므로, 헌법과 법치를 존중해야 한다” 등 취지의 발언을 했다.

최연혁은 한 사람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다. 한 국가는 대통령이 좌우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지도자(리더)가 추종자 앞에서 규율과 영을 세워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도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과 상충한다. 봉사와 헌신은 다소간 권위주의적인 규율과 영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는 맥락이 달라서, 서로 맞물리는 개념이 아니다.

최연혁의 비민주적 권위주의는 ‘헌법과 법치’의 개념에서 노골화한다. 그에 땨르면,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리더)가 ‘헌법과 법치’로 추종자(팔로어)들을 이끈다. 헌법과 법치‘를 전면에 부각시킨 최연혁을 보면, 현 정부 들어서 대통령 윤석열이 입에 달고 다니는 구호가 연상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헌법과 법치’가 아닌 시민 자율의 공간, 추종자로서가 아닌 자유 시민의 존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헌법과 법치 위에 민주가 군림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 민초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헌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면, 헌법도 국민의 의사에 따라 변경되어야 한다. 40년이 다 되어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도록, 여전히 구태의연한 (헌)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면 안 된다. 법이 변화된 현실에 맞지 않으면, 관행으로 법을 변경 조정해야 하고, 관행에 따라 법이 따라 바뀌어야 한다.

스웨덴에서 35년을 살고 돌아와서 한국 정치의 방향을 정립하겠다고 나선 최연혁은 그 설정부터가 잘못된 것 같다. ‘리더십(지도자)과 팔로어십(추종자)’이라는 외래어를 차용하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전체주의 개념을 내세워, 집권적, 획일적 권력구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획일적 개념은 실체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분산된 권력의 주체로서 시민 개인뿐이다.

35년 스웨덴에서 살았다고 하는 최연혁은 스웨덴 정치의 정수인 지역분권은 귀동냥하지 못한 것 같다. 대놓고, 그것도 같은 알아듣기도 어려운 외래어로, ‘리더십(지도자)’, ‘팔로어십(추종자)’ 같은 개념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 민초의 눈을 가리고 우롱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유럽 정치 선진국의 이름을 팔면서 정작 그 정수인 분권을 생략해버리는 고약한 행태는 최연혁에게서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곽정수(베를린·쾰른 [주재] 선임기자)가 모슬러 교수의 입을 빌려 전하는 바, “독일의 정치적 안정이 의원내각제를 통한 협치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가 드러난 만큼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를 모두 개혁”해야 한다(한겨레, 2023.10.6.)는 말도 그 같은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치적 안정이 “의원내각제를 통한 협치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어야 한다. 의원내각제와 협치 이외에 독일의 안정에 기여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분권’이다. 독일도 스웨덴같이 중세 봉건적 지역 독립성이 강했던 곳이다. 독일의 각 주(Bund)는, 독립국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어 고유의 헌법과 통치조직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독일의 정치적 안정은 이 같은 지역분권에서 나온다. 과도한 중앙집권 구조에서 있을 수 있는 권력의 오용과 위험한 독주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방정부는 각 주로부터 최소한의 기능을 위임받아 있을 뿐이고, 이 같은 분권 구조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애당초 발생할 수가 없다. 독일에 제왕적 대통령제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각 지역의 분권적 권력구조 때문이지, 곽정수가 전하듯이, “연방의회의 의원내각제나 협치 때문만”이 아니다.

최연혁과 곽정수는 정작 현지 유럽의 분권 권력구조가 갖는 의미를 감추고 있다. 전자가 내건 ‘리더십’, 후자의 ‘의원내각제’는 한국의 중앙집권적 구조에 대한 수정의 의지가 없음을 반증한다. 오늘 한국이 처한 질곡의 대체가 지나친 집권적 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은폐하는 것이라 하겠고, 이 같은 목적성 왜곡은 한국 시민 민초를 농락하는 것이다.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같은 왜곡은 국회의장 김진표 등, 호시탐탐 중앙 국회에 권력을 집중시키려고 의원내각제 개헌을 노리는 이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혹자는 의원내각제를 도모하는 이는 일본 자민련같이 장기집권을 노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다. 일본은 지역분권이 한국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잘 돼 있어서, 수상이나 수도 국회의 권력 전횡이 일어나기 어렵다. 또 혹자는 일본이 한국보다 정치 후진국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독재정권이 나타날 수 없는 분권적 권력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지방 공무원은 중앙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도 한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가는 교부금이라는 것도 일본과 한국은 그 내용이 아주 다르다. 한국에서는 일괄적으로 근 80%가 중앙의 손을 거쳐 지방으로 내려 보내진다. 이 과정은 중앙이 각 지역을 길들이고, 중앙의 정책 노선에 부합하도록 각 지역을 조종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일본의 지방교부세는 지방자치단체 간 재정력의 격차를 조절하기 위한 제도일 뿐이다. 보통 예산에 여유가 있는 대도시 등 자치단체에는 지원되지 않고, 과소지역, 농촌지역의 자치단체에 많은 예산이 지원된다. 이 경우, 국세의 일부분을 자치단체의 일반재원으로 교부하는 것인데, 일반재원이란, 중앙정부가 용도를 지정한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그냥 일반 예산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이다.(송영철, 현장에서 바라본 일본의 지방자치, 한국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 발행, 2001, 113-114쪽)

일본에서 지방세, 지방교부세(정부로부터 조건 없이 지방으로 이전) 외에 부보조금이 있다. 보조금은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는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으나, 일본의 경우 대체로 중앙으로부터의 제약이 지방정부활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정도는 아닌 것으로 평가되며, 그럼에도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경계하여 보조금을 줄이고 교부세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 혹은 용도가 특정된 “특정보조금에서 교부세 혹은 일반보조금으로 전환” 등의 주장이 대세라고 한다.(村松岐夫, 최외출, 이성환 번역, 중앙과 지방관계론, 대영문화사, 1991, 145, 153-154쪽)

이런 일본의 지역자치단체의 재정 독립성은 근 80% 예산의 씀씀이가 중앙 통제하에 있는 한국과는 천양지차이다. 한국의 중앙권력 독주는 일제식민지와 박정희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더 심해졌다. 거기다 한국에서 의원내각제 도입의 시도가 일본 자민련(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 연합)의 장기집권 같은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만큼도 아니고, 그보다 더 열악한 지경에 처할 전망이다. 일본은 지역분권이 건재하여, 중앙의 수상이나 의회가 권력을 전횡 독재할 수 없다.

일본의 지역분권은 중세 봉건적 지역할거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1867년 명치유신 이후 다소간 중앙집권의 시도가 있었으나, 1993년 6월 <지방분권 추진에 관한 결의>에 따라, “일본의 수도 도쿄에 모든 기능이 집중되는 것을 배제하고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며, 지방분권 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이런 일본의 정황은 최근 느닷없이 발표된 한국 정부의 김포시 서울 편입 발상과는 딴판이다. 국회의 의원내각제나 정부의 수도 광역화 기획은 중앙권력의 강화에서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유신독재(1972)가 시작되기 10년 전인 제3공화국 초기, 기초 자치단체를 통폐합하여 시군구(市郡區)로 전환했다. 이런 전격 조치는 평시에는 불가능하겠으나, 군사쿠데타의 살벌한 상황에서 가능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군사쿠데타가 없었으므로, 이 같은 강압적 조치는 불가능했다. 일본에도 중앙집권과 지역분권 간 알력이 있고, 중앙정부의 기초자치단체 시·정·촌(市·町·村) 통폐합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점진적인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소규모 정촌(町·村)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혹자는 심지어 한국이 일본보다 행정 효율 면에서 낫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민주는 효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자면 일본은 ‘제로 금리’, 혹은 ‘마이너스 금리’의 나라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단기금리 –0.1%(마이너스 금리), 장기금리 0±0.25%였다.(아시아경제, 2022.10.30.) 며칠 전인 2023.10.31.일 일본은 장기금리 1% 초과를 용인했으나, 단기금리 등 마이너스 금리는 그대로 유지한다.(한국경제, 2023.10.31.) ‘마이너스 금리(-0.1)’란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가 붙는 것이 아니라 원금을 까먹는다는 뜻이다.

세계 주요국이 금리를 올리는 판에 일본은 왜 ‘제로 금리’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나, 명확한 것은 돈이 돈을 버는 힘, 즉 자본이 불로소득을 낳는 힘이 일본에서는 최소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노동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말도 될 수 있다. 그저께 제3차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를 무대뽀로 시작한 일본 기시다 정부는 지탄받고 마땅한 책임을 지워야 하는 것이겠으나, 일본 사회구조와 저력을 한국보다 야만적, 후진적 운운하며, 속단, 폄훼하는 것은 금물이다.

사랑하고 자식 낳고, 또 미워하고 서로 부대끼는 인간의 삶은 효율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효율은 행정, 관료 편익주의를 뜻하며, 개인 자유와 긍지를 짓밟는 독재의 밑밥이다. 한국 사회에서 관료 편익주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재판이다. 판사 수가 적어서 업무가 과중하니, 재판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러하다. 여기에 공정성이 자취를 감추었다. 60% 이상이 반대하는 여론을 무시한 김포의 서울 편입 강행은 민주를 말살하는 독재와 관료 편익주의 전통에 편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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