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대 교수 존 던은 김대중의 이름을 빌어,
김대중의 즉각 저항 정신을 ‘느린 깨달음’으로 전도
민주의 정수(精髓)는 ‘느린 앎’의 과정이 아니라 원초적 욕망의 상호조정 기제
국민을 배제하는 대통령 견제 못 하는 국회는 직무유기
개딸은 의원내각제의 천적
포퓰리즘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 그 ‘폐해’는 분권을 통해 최소화
분권 구조에서는 무능, 탐욕한 대통령이 나와도 피해가 최소화
한겨레신문 대기자 박찬수가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표제의 글을 올렸다. “적법한 선거로 뽑힌 대통령을 두고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가 번지는 건 아픈 일이다. 더 안타까운 건, 대통령이 다수의 국민을 배제한 채 국정을 끌고 가는 걸 지켜봐야 하는 국민의 마음이다”라고 썼다.(한겨레, 2023.9.14)
박찬수의 이 같은 말은 알게 모르게 언중 의미 하나를 누설하고 있다. 국민을 배제하는 대통령의 행위를 두고 명색이 삼권분립의 나라에서 현실적으로 아무 기관도 견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국민이 하릴없이 마음 졸이고 지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행정부를 견제 해야 할 의무를 가진 국회가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민은 국민을 배제한 대통령을 그냥 지켜봐야 하고, 그런 대통령을 견제, 제어하지 못 하는 것은 민주 국가가 아니다. 거기에 식물 같은 국회가 한몫하고 있다.
박찬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책임총리제를 제시한 적이 있다. 국회에서 뽑는 총리가 다소간 대통령의 권한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이 책임총리제는 현재 민주당 소속 국회의장 김진표가 주창하는 의원내각제의 임시변통형이다. 대통령이 옳찮으니, 대타로 국회에서 총리를 뽑아 대신하거나 그 권력의 일부를 나누어 갖게 하자는 발상이다.
그러면 국회는 ‘나의 국회인가?’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다. 대통령이나 국회가 그 나물에 그 밥 같기 때문이다. 여(與)의 국힘당은 대통령의 2중대 같고, 야(野)의 민주당도 한마음이 아니다. 적지 않은 수의 수박들은 국힘당 2중대 같을 때가 있고, 이 수박들은 개딸들을 나무란다. ‘팬덤’이나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개딸들은 의원내각제의 천적이다. 원래 의원내각제라는 것은 가능한 한 국민의 정치적 발언권을 생략하고 국회에서 총리를 뽑아 다소간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해주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민이 뽑는 대통령이 부득이 허수아비화한다. 국민 민초가 정치 개입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것이 틀림없다. 개딸들이 목소리 내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그 같은 맥락이다.
한겨레신문은 <미국, 한국 정치 포퓰리즘 우려.. 잘못(할) 땐 시민 깨어나 행동해야>라는 글을 실었다.(한겨레, 2023.9.19.) 김대중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고 하는 존 던 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의 대담(인터뷰)을 실은 것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한편에 정치적 포퓰리즘, 다른 한편에 정치적 지도력을 서로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후자에 편승한다.
먼저 전자 관련하여, 상대 대담자로 임한 연세대 교수 박명림은 포퓰리즘을 두 가지로 구분 한다. 아래로부터의 포퓰리즘, 그리고 지도자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민을 갈라치기하는 위로부터의 포퓰리즘이다. 두 경우 다 부정적인 의미이다. 존 던도 맞장구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흑백 논리로 국민을 가르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죽음이다“, ”양극화 포퓰리즘 진영 대결 악화” 등 취지의 말을 했다.
정치적 지도력 관련해서는, 정치적 결정은 정치 행위의 시행자가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경쟁하는 당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그 주체로서 기회, 특권, 부를 가진 자들일수록 당사자가 되기 쉽다고 한다. 이 말은 국민 민초를 아예 능동적 정치행위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정치적 지도력은 어떤 법을 기초로 삼고 적용할 것인가, 또 그걸 실행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등을 면밀히 살피는 능력이지만, 시민들에게는 수동적으로 선택권이 주어진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대통령뿐 아니라 예의 영국인도 한국 교수도 국민을 정치 행위에서 배제하고 있다.
더구나 두 대담자는 위정자들이 공평하지 못 한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응한 아무런 견제 조치 마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행위 시행자에 의해 내려진 결정이 시민들의 이해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고 위정자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법이 다르게 적용되기도 하지만, 명백히 정치적인 결정을 법 집행일 뿐이라며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하다.
여기서 박명림과 존 던은 두 가지의 전제를 깔고 있다. 첫째, 정책 실행자와 피실행자 시민이 구분되는데, 전자는 흔히, 기회, 특권, 부를 가진 자들로서, 사회, 경제적 기반이 원천적으로 후자와 구분된다. 둘째, 이 정치적 지도자들이 법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거나 왜곡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 경제적 특권층으로서 이른바 정치적 지도자인 이들의 권력 오남용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을 두 대담자는 뜬금없이 인간의 지성, 깨달음, 교육 등에서 찾는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에는 긍정적, 부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는데, 긍정적인 것은, 민주주의는 인간의 지성을 활용해서 잘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고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부정적인 것은, 대의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정치인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민주주의가 위험해진다는 것인데, 억압으로부터의 보호를 포함하여 민주주의 아래에선 최소한의 기능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억압으로부터 보호되는지, 최소한의 기능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 구체적 방법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이 같은 선언은 수박 겉핥기같이 피상적이다.
존 던은 정치의 목적을 대화와 타협으로 규정하고, 자기 생각과 다른 다수의 목소리에 따라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법과 경제는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가 있으나, 정치는 모든 것을 아우르기 위한 조정, 조율의 기예라는 것이다. 이렇듯, 존 던은 한편으로 시민에게 선택권은 있다고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마저 뭉개 버리고 다른 다수의 목소리에 따라야 한다고 한다.
그 ‘다수’는 ‘정치적 지도자’를 배제하고 산술적으로 계산한 다수를 뜻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두 대담자는 “정치적 지도력이 필수적이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막중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 시민은 배움, 교육을 통해 교도되는 존재로 나타난다. “인간은 느리지만 결국 배워서 알게 된다”, “민주주의는 교육과 어울릴 때 가장 잘 발현된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정치적 지도자’와 일반 시민에 대한 이 같은 차별적 이해는 정합적이지 못 하고 불평등하고 자의적이다. 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되면, 당연히 교정하고 징벌하여 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수정은 시간적 지체가 없이 이루어져야 피해가 적어지게 된다. 느리게, 결국 배울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는 것이다. 피해자로서 권력에 저항하고 ‘정치적 지도자’를 처벌하고 나서야 할 판에, 이 두 대담자가 뜬금없이 ‘교육과 느린 앎’의 개념을 대입했다.
존 던은 김대중과 케임브리지대 이름을 앞세워, 김대중을 왜곡했다. 평생을 부당한 권력에 맞서 지체하지 않는 저항으로 일관한 김대중의 정신을 ‘느린 앎’의 과정으로 치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위정자와 시민, 양편에서 모두 교육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정치란 서로 욕망과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일 뿐이고, 인간의 욕망은 교육을 통해서 수정되는 것이 아닌 원초적 감정이다. 정치의 목적이 대화와 타협이라면, 그것은 상호 욕망과 갈등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공정하지 못 한 강요에 대해서는 즉각 저항권을 행사해야 한다.
게다가 이들의 지론에 따르면, 정치적 지도자가 아닌 시민 민초가 누군가를 지지하고 나서면 안 된다. 왜냐면 그것은 포퓰리즘이고, 포퓰리즘은 민주정치를 망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그저 정치적 지도자들이 제시하는 안에 대해서 선택만 하고 있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선택안이 없을 때도 그러하다. 현재로서 한국에서는 시민에게 발안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두 대담자는 맹랑하게도 시민들의 능동적 정치 행위를 애초에 봉쇄하고 기를 꺾으려 획책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민이 ‘정치적 지도자’를 상전으로 모시고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개딸도 있어야 하고 태극기 부대도 원한다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올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모든 이가 원하는 대로 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행위의 타당성 여부를 불문한다. 민주 개념은 이성과 무관하게 민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다만, 그 행위나 결과가 남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사회적 환경을 구성할 필요가 있겠다. 이 같은 필요성은 민초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법을 불공정하게 집행한다든가, 잘못된 정치 결정을 합법적이라 우기는 경우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환경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권력의 단위를 가능한 한 세분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이나, 개딸들 혹은 태극기 부대들의 포퓰리즘이 피해를 낳는 경우가 있다면, 그와 연관된 권력의 덩이가 클수록 피해의 위험은 커진다. 포퓰리즘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권의 구조를 가능한 한 분권적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겠다.
야당 대표 이재명은 “권력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 자체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 권력의 크기가 클 때, 그리고 그 권력이 이재명 아닌, 사리, 탐욕으로 그득한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경우 치명적인 독소가 될 것이라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는, 본성이 어질다 해도, 부득이한 인간의 독선, 혹은 본의 아니게 측근이 치는 장막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 질 수도 있다.
권력을 둘러싸고 야기될 수 있는 갖가지 위험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두 가지 장치가 불가피하다. 첫째, 인간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권력 단위는 가능한 한 세분하는 것, 둘째, 정치적 지도자 혹은 공직자의 사리 탐욕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국민 민초에 의한 감시 및 처벌의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다.
분권의 장치를 통한다면, 한편으로 무능한 대통령이 나와도 크게 염려할 것이 없다. 혼자서 좌지우지할 여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딸은 물론 태극기 부대에 의한 정치적 부작용 또한 최소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민초는 합리성 여부를 떠나서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지지하고 행동할 수 있다.
또 대통령이 무능하거나 탐욕스럽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혹은 타자가 다른 것, 다른 이를 지지한다고 해서, 포퓰리즘으로 매도할 필요가 적어지게 된다. 원심적 권력 구조에서 그런 것이 초래할 피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애초에 비난은 해도 별 소용이 없다. 사람은 비난한다고 쉬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타자를 욕하는 이는 스스로 권력지향적이다. 이들은 대통령을 욕해서 그 권력을 국회로 가져오고 싶어 하고, 또 개딸들 욕함으로써 국민 민초의 정치적 발언권을 배제하는 의원내각제를 도모하려 한다.
포퓰리즘을 욕하는 한겨레신문은 그런 점에서 다소간 권력지향적인 이들을 대변한다. 사흘이 멀다 하고, 한편으로 ‘제왕적 대통령제’ 운운하고, 다른 한편으로 의원내각제 혹은 책임총리제를 주창하는 한겨레의 눈에는 꽹과리 소리 요란한 국회의 질곡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증거를 조작하여 무고한 시민에게 공연한 피해를 입혔다면 당연히 탄핵해서 징벌하고 예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국회는 탄핵을 가결하지 않는다. 가짜 ‘찌라시’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사 탄핵에 반대한 이들의 명단에, 민주당 원내대표 홍익표, 판사 출신 이탄희 등도 들어 있다고 한다. 혹여 이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과반수 민주당을 통틀어 결과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