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대통령’이란 대통령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개헌론자들이 만들어낸 허구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은 질곡을 더 할 뿐, 5년 단임제와 본질상 같은 것
탄핵 대상보다 더 음흉하고 간교한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론자들
야권 일각에서 대통령 ‘임기 단축 개헌’이 거론된다고 한다. 이는 정치적 부담이 큰 탄핵을 피하고 ‘질서 있는 퇴진’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여기에 약방 감초같이 끼어 따라나오는 것이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담론이다.
이미 1년 반 전 총선을 대비하여 중대선거구제 개헌하자는 말이 나오던 즈음, 느닷없이 이재명(현 민주당 대표)이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하자고 운을 뗐고, 올해 총선에서 조국이 비례 12석을 확보한 바로 다음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하자고 기자회견 했으며, 나경원이 이번 국회에 입성하자 바로 그 같은 발언을 했다. 급기야 사회단체까지 가세하여, ‘전국비상시국회의’ 명의로 ‘윤석열정권 임기 2년 단축 개헌 제안 사회 원로 기자회견’을 가지고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다.(2024.10.31. 송기인, 이부영, 함세웅, 황석영 등 23명 원로)
그런데 한편의 탄핵 혹은 ‘질서 있는 퇴진’ 혹은 현 대통령 임기 단축, 다른 한편의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이 서로 무슨 연관이 있나? 양자 간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윤석열이 탄핵 당하거나 임기 단축되거나 스스로 퇴진 하거나 간에, 그것이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과 필연적 연관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 때문에 5년 단임제가 나쁘다거나 4년 중임제 개헌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대통령 임기와 윤석열은 별개의 문제이다.
전 민주당 의원 김두관은 윤석열을 향해 대통령 임기 단축과 개헌 추진을 결단하라고 요구했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으므로, 더 버티지 말고 연말까지 임기 단축과 개헌을 추진하라는 것이다.
김두관의 이 같은 요구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왜 개헌을 대통령이 추진하나? 개헌은 국회에서 하는 것이다. 개헌은, 대통령이 하라 한다고 하고, 하지 말라 한다고 못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둘째, 국민이 분노하는 것과 임기 단축이 서로 무슨 연관이 있나? 국민이 분노하면, 임기 단축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축출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 축출은 현재 국민투표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국회에서 해야 한다. 셋째, 윤석열 축출이 왜 개헌 논의와 맞물려야 하고, 개헌이 왜 보편적인 대통령 임기 변경을 위한 것으로만 한정되어야 하나? 근 40년 만에 하는 개헌에서 그리 할 것이 없어 대통령 임기 변경에 초점을 두나?
‘물 같은 국회’에 대한 일말의 반성 없이, 국회는 물론 국민 민중까지 덩달아 나서서 ‘제왕적 대통령’ 운운하며, ‘대통령’을 손가락질 하고 있다. 그러나 목하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제왕적 대통령’ 제도 때문이 아니라, 행정부를 견제하지 못하는 국회 탓이다. 그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 전 정권에서 대통령은 제왕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검찰총장이 제왕적으로 군림했고,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향해 “고작 5년짜리가 겁도 없다”고 나무랬다. 당시 검찰총장인 윤석열은 특활비를 방만하게 집행한 사실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었다. 뿐 아니라, 당시 법무부장관 후보자였던 조국의 임명을 방해하려 한 것으로 회자하고, 이재명 부인 김혜경을 한 번의 소환조사도 없이 기소했다. 윤석열의 이런 행위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전혀 무관하다.
문제는, 대통령제가 원래 제왕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불법, 위법으로 월권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뿐 아니라 검찰총장으로서도 윤석열은 특활비 집행 등에서 불법 혹은 위법 혐의에 연루되어 있다. 그렇다면, 현금의 난국은 5년 단임제 대통령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월권하는 공직자 및 대통령을 두루 단속, 추달해야 하는 국회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현재로서 국회는 대통령 등을 견제, 제어할 능력이 없고, 제도가 갖추어져 있어도 나약해빠진 국회가 그런 것을 감당할 의지조차 박약하다.
둘째, 윤석열이 쫓겨나든, 임기가 단축되든, 스스로 물러나든, 이는 대통령 5년 단임제 혹은 4년 중임제 여부와 전혀 무관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5년 단임제로 나름 성과를 남겼다. 또 4년 중임제로 바꾼다고 해서 지금 같은 정권이 들어서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윤석열 퇴진은 대통령 중임제의 정당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5년이 길면 4년으로 고치면 되는 것이지, 왜 거기에 중임제가 따라 나오냐? 정치판에서 뼈가 굵은 '철새' 정치인 김종인(전 국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4년 중임제가 더 열악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내다봤다. 제도란 어느 것이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으로, 중임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셋째, 대통령제가 아니라 국회가 문제인 것은 국회가 궁극적으로 다수결이 아니라, 비민주적 소수결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거부권 행사가 먹혀드는 것은 국회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국회의 비민주적 ‘소수결 원칙’ 에 기인한다.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국회가 요긴하게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수결(1/2)이 아니라 소수결(1/3)로 재의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결이 다수결을 제압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 질곡은 대통령 한 사람이 제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회 자체가 비민주적 소수결에 의해 움직인다는 데 원인이 있다. 거부권 작동은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소수 의견에 의해 다수가 무시되고 있는 국회의 문제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국회에서 재의결 할 때는 재적의원 2/3의 찬성표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견제하려면, 재의결 정족수를 최초 의결 정족수처럼 1/2로 입법하면 된다. 의결 정족수는 1/2인데, 재의결 정족수는 2/3를 요구하는 것은 다수결의 민주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유럽 여러나라에서도 재의결에서 최초 의결과 달리 2/3의 정족수를 요구하는 곳은 흔치 않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는 제왕적 대통령 아닌 국회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수결의 원리를 부정하는 국회의 소수결 원칙이 다수 국민의 의사를 배반하고, 소수 특권층의 기득권을 흔들리지 않는 아성으로 굳히고 있는 원흉이다.
다수결과 (사안에 대해 직접 결정권을 행사하는) 국민투표 제도를 부정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논리가 작동한다. 첫째, 소수의 권리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 둘째, 대중은 감정에 쉬 흔들리는 ‘중우(어리석은 군중)’이므로 대의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가 있으나 여럿이 모이거나 인간의 어리석음은 피할 수가 없다. 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돌연 현명한 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둔과 현명의 차이가 아니다. 소수결 원리는 소수의 특권층이 다수가 원하는 바를 억누르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작동한다.
‘소수 보호’의 명분으로, 약자 아닌 기득권 소수의 특권이 보호되고 있고, ‘대의 민주’의 이름을 빌어 다수 국민 민중의 뜻을 배반하는 질곡이 행정부와 여의도 입법부에서 목하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민주’가 아니라 '대의 과두'이다.
한편, 대통령 임기제 개헌 담론은 흔히 내각제와 맞물려 등장한다. 작가 겸 전 대학교수로 자신을 소개한 양의모란 이가 한겨레신문(2024.10.31.)에 “제왕적 대통령 임기 반환점, 내각제 논의할 적기다”라는 표제의 글을 실었다. 양의모는 일본에서 10년간 유학하며 얻은 바, 내각제의 장점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양의모에 따르면, 내각제의 장점으로, 의회가 총리 및 내각불신임을 결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의 사퇴도 지지율이 곤두박질쳐 총선(중의원 선거)에서 불리하게 된 자민당이 기시다를 하차시킨 것이란다. 이는 임기가 보장되어 있어 여당조차 무시하는 행보를 보이는 대통령제의 폐단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라는 점도 들었다.
양의모의 지론은, 대통령을 ‘제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권한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총리에게 넘기자는 것이고(의원내각제), 그것이 갖는 장점의 사례를 일본에서 구했다. 그런데, 양의모는 일본 의원내각제의 장점만 이야기하고, 단점은 거론하지 않았다. 기시다가 물러난 다음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부패에 연루된 의원 40여 명의 공천을 강행함으로써, 국민의 분노를 샀고, 결국 이번 총선에서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다수당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의원내각제가 끼리끼리 해먹는 이익집단이라는 점이 이번 총선을 통해 노정되었다는 점을 양의모는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양의모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면서, 그것을 제왕적 대퉁령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은 ‘제왕적’이 아니다. 윤석열은 ‘제왕적 대통령’ 제도 때문에 나타난 인물이 아니라, 손에 닿이는 대로 온갖 권력을 제왕적으로 행세한 것뿐이다. 검찰총장직을 제왕적으로 만든 것이 그 반증이다. 윤석열은 제도가 낳은 산물이 아니라, 제도의 틈을 비집고 불법 혹은 위법을 자행한 이에 대해 제때에 효과적으로 견제, 대처, 처벌하지 못한 무능한 국회가 낳은 작품이다. 국회에서 가결한 입법을 대통령 및 검찰총장(한동훈)이 시행령으로 무력화 했을 때도, 국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한편, 일본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나서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양의모에게서 드러난다. 자칭 일본에서 수년을 공부했다고 하는 이가 보고 들은 것이 오로지 의원내각제밖에 없고, 일본이 한국보다 더 분권이 발달된 나라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은폐한 것이다.
일본은 지역 봉건 군웅(쇼군)이 할거하던 전통을 이어 지방분권이 한국에 비길 수 없이 발달되었다. 우선 기본 예산을 중앙이 아니라, 지방정부가 짠다. 그래서 적어도, 지금 한국같이 중앙 행정부가, 있는 이들에게 일괄 '부자 감세' 해서 세금수입이 줄어들고, 개 보호한다고는 돈 쓰지만 지방정부에 내려보낼 교부금은 줄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양의모는 의원내각제 운운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일본의 사례를 빌어, 대통령과 국회의 중앙 권력을 지방으로 분산시켜야 할 것이라는 점을 소개했어야 했다.
대통령을 뽑기만 하고 나 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잘못 뽑았다고 생각될 때, 뽑은 이가 뽑힌 이를 쫓아낼 수 있는 제도도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민 민중은 뽑는 권한만 있을 뿐,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은 현재로서 국회가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국회는 당장 쫓아내지 않고, 벼르고 시간만 연장함으로써, 그 피해가 고스란히 다수 국민 민중에게 돌아오고 있다.
국회 내에는 좋든 싫든 잘못하는 대통령에게 동조하는 정당 세력이 존재한다. 대통령과 국회가 공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만 나무랄 것이 못되고, 국회도 다소간 한통속이다. 국민 민중과 권력 중개인(브로커) 여의도 국회의 문법은 따로 간다. 그래서 각기 바라는 개헌의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지금 대통령의 독주와 국회의 무능은 중앙집권의 폐해를 노정한다. 과도한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대통령 한 사람의 자질에 따라 상황이 급변한다. 권력의 집중이 낳는 이러한 폐해는 대통령 4년 중임제 및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분권을 통해서만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행정권을 지역으로 분산하고, 입법권도 지역 의회로 분산하고, 그에 따라 지역정당도 합법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1인 대통령과 소수 국회의원이 어우러져 벌이는 잡탕 정치판의 폐해는, 권력을 지역으로 분산함과 동시에, 선출, 임명직을 막론하고, 국민 민중이 바로 공직자를 처벌,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만이 막을 수 있다. 차기 권력을 노리고 현재의 질곡을 시간적으로 연장하는 국회를 믿고 있을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회 위정자들은 물론 다수 촛불 시민들은 윤석열만 물러나면 되는 줄로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윤석열은 검찰총장 시절 떡값 등 명목으로 특활비를 하루에도 수억을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가져간 것으로 회자하는바, 이것은 제왕적 대통령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들어서기 전 검찰에 몸담고 있을 때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대통령이 제왕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무시했다. “고작 5년짜리가 겁도 없이”라고 폄훼했던 사실이 그러하다.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 공권력이 총체적으로 썩어빠진 것이고, 거기에 견제, 감독 장치가 젼혀 없거나, 형식으로 형식으로 갖추어져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검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부패는 한국 공권력 전반에 종체적이다.
그렇다면 국회는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에서 4년 중임제로 바꾸자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직자의 일탈을 방지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국회 및 언론은 뜬금없이 대통령 임기를 문제삼는 것일까. 윤석열의 임기만 줄이면, 5년 단임을 4년 중임으로만 바꾸면, 만사형통하고, 공직 사회가 맑아지나?
그렇지 않다. 대통령 4년 중임 개헌론은 총리제 혹은 의원내각제와 연관되어 있고, 이것은 권력 놀음이다. 여야 누구에게 권력이 가든 순서대로 주거니 받거니 하자는 뜻이다. 권력 놀음 하는 이들 위정자의 눈에는 당장에 속이 뒤집혀있는 국민 민중이 안중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이른바 ‘대통령 놀이’하는 윤석열과 김건희와 같은 반열에 있다.
1987년 헌법이 여태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것은 새로운 민주적 원리가 도입될 것을 두러워하는 기득권층 때문이다. 근 40년 다 되도록 낡은 헌법의 개정이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는 데 한정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4년 중임제 자체가 새로운 질곡의 단초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왕적 대통령 제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음으로 양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를 추진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윤석열이 불법 혹은 위법하게 월권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제도의 잘못이 아니라, 개인의 일탈이므로 처벌, 견제, 축출할 대상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국민 민중의 정치적 발언권을 배제하고 들러리로 만든 유신헌법 잔재의 청산 없이, 대통령 임기만 바꾸자는 개헌 담론은 또 다른 윤석열, 더 진화한 윤석열을 배태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같은 논리로 과거를 조명하자면, 현재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론자들은 지난날 윤석열이 등장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배태하는 데 다소간 기여한 장본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