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위원장 후보 안창호가 차별금지법(평등법)에 반대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등, 반인권적 발언 한 사실이 알려져 도마에 올랐다.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답변서에도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인권위 ‘역주행’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유엔이 한국 정부에 이행 권고 중인 핵심적인 국제인권규범이다.
안창호의 말을 개념군으로 정리하면, 첫째,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부모-자식 간 성적 행위, 소아성애, 수간(짐승과의 성행위) 등이 정당화 될 수 있다”, 둘째, “질병 확산의 우려가 있다”, 셋째, “차별금지법 제정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간다”, “많은 문화 막시스트(마르크시스트)들이 ‘우리의 주적은 기독교’라며 동성애가 사회주의 혁명의 수단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이 공산주의 혁명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현한 것”, 넷째, 차별금지법이 “표현과 종교의 자유 등을 침해”, “역차별 초래”, “공산혁명 가능성이 있고 다수의 표현의 자유가 침해된다” 등이다.
이런 안창호의 주장은, 논리의 부정합, 개념의 비약, 독단적 유추 및 단정 등으로 인해, 뒤죽박죽의 허황한 말이 되어버렸다. 첫째, 부모-자식 간 성적 행위, 소아성애, 수간(獸姦: 짐승과의 성행위)은 차별금지법과 무관한 담론이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장애, 나이 등 21개 사유로 고용 등 4가지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일 뿐, 안창호가 말하는 그 같은 행위에 관계하지 않는다.
둘째, “질병 확산”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 안창호의 개인적 ‘우려’이다. 안창호는 ‘우려’를 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기정사실화하는 우(愚)를 범했다. 이런 것을 독선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동성애가 보편화된 사회였으나, 그로 인해 질병이 확산된다는 개념은 없었고, 오히려 혈연이 개재하지 않는 사람들 간의 결속력을 높이는 것으로 권장되곤 했다. 또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거꾸로, “동성애, 혐오, 차별, 빈곤 등의 사회 구조적 문제가 건강에 영향을 미치고 불평등을 유발한다”고 본다.(한겨레, 2024.8.14.)
셋째, 차별금지법이 공산주의 혁명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안창호의 주장은 비논리의 극치를 보여준다. 차별금지하지 않고, 동성애자 등 소수자를 차벌하면 공산주의가 발호하지 않나?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이 동성애자를 처벌하지 않아서 공산주의 사회가 되었나?
말이 말 같지 않은 안창호의 발언은, 그럼에도 일말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동성애건 뭐건 무관하게,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온갖 사회적 동향은 차단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창호의 주장은, 차별금지법이 실제로 공산혁명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거꾸로 공산혁명을 저지하기 위해서 개인 행동을 차별법으로 규제하겠다는 의지를 노정한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서, 그 차별받는 이들이 동성애자이건, 경제적 약자이건 간에,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안창호의 신념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수간(獸姦), 질병확산 등은 부차적 구실이며, 핵심은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는 금기이며, 각종 차별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귀결된다.
넷째, 안창호가 거론하는 자유가 윤석열이 말하는 일방적 자유 개념과 닮았다. 차별금지법이 “표현과 종교의 자유 등을 침해”, “역차별 초래”, “소수에 의한 다수 표현의 자유 침해” 등의 개념이 개인이 아닌 국가중심적 사고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안창호에 따르면, “동성애 하는 사람들은 자유이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소수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하지만,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 “동성애에 대한 합리적 비판은 가능해야” 라고 한다.
여기서 안창호는 소수라고 해도 다 같은 소수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힘없는 소수는 다수를 차별하거나 다수에게 강요할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소수의 경우 그런 것이 가능하다. 결국 문제는, 안창호가 말하는 다수, 소수 여부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알력으로 귀결된다. 안창호는 헌법재판관으로서 그의 뒤죽박죽 철학을 알게 모르게 그 결정에 적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철학은 그가 기피하는 공산주의 이념이 다소간 포괄하는 평등에 대한 혐오였다.
성소수자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감리교파에서 파문당한 이동환 목사는 “누군가의 인권을 억압하는 종교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안창호는, 건국대학교 법전문대학교 교수 한상희에 의하면, “성소수자 문제를 헌법, 인권의 논리가 아니라, 일부 종파의 의견으로 바라보며, 세속국가가 아니라 종교국가, 신성국가로 만들려는” 자이다.
그런데, 안창호가 믿는 것이 밑고 끝도 없이 황당무궤한 것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그것이 개인 자유의 영역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헌법상 개인의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안창호가 기독교의 창조론을 믿건 말건,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건 말건, 그것은 개인 소신의 영역이다.
더 큰 문제는 안창호가 지난날 헌법재판관으로, 또 지금은 인권위 위원장으로서, 그 같은 개인의 터무니없는 소신을 공적 결정에 반영하여 타인에게 불이익을 초래했고 앞으로도 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개인적 믿음 혹은 편견으로 인한 독선의 부작용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견제장치가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헌법재판소는 연방정부(분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16개 주(란트)에 각각 다 있다. 뿐 아니라 각 주는 각기 고유한 헌법(주법)과 최고법원(대법원)을 따로 가지고 있다. 각 주의 대법원까지 거쳐도 여전히 미흡한 판결에 대해서는, 각 주 혹은 연방의 헌법재판소로 소원을 낼 수가 있다. 각 주의 대법원, 헌법재판소, 연방헌법재판소 간에는 자연히 치열한 법리 싸움이 전개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객관성이 확보되며, 개인의 독선과 허황한 권위주의는 자리할 곳이 없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법원(대법원까지 3심급)과 헌법재판소가 따로 놀고, 후자가 전자의 판결의 오류를 걸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한다.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재판소원을 원칙적으로 금지)에 의해, 일반법원(대법원까지 3심급)의 판결을 거친 것은 헌법재판소로 소원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관 간에 얼굴 붉히며 다툴 일이 없도록 아예 영역을 갈라버린 것이다.
이 재판소원 금지 조항이 위헌이라는 취지의 위헌법률심판제청이 시민들에 의해 여러 번 이루어졌으나, 헌법재판소는 번번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가 합헌인 것으로 내거는 이유도 황당하다. 대법원까지 3심급을 거쳐도 재판이 잘못될 수 있고, 네 번째 구제 장치(헌법재판소)가 있는 것은 이상적이지만, “정의는 궁극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재판소원 금지가 합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을 고치고 싶으면 국회에서 고치도록 하라고 그 책임을 국회로 미루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위헌법률심판제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최초 합헌결정이 나온 뒤 30년이 다가오도록,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적극 나서서 국회에 대해 재판소원금지 조항을 수정하라고 종용할 일도 없을 것이 명확하다. 그럴 요량이었다면, 이 조항을 아예 '합헌'이라고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국민 민중을 우롱하고 있고,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사법권력의 부패에 공조하고 있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대법원 등 일반법원과의 법리 다툼을 원천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일반법원의 일탈을 묵인하고 폐해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간 관 다툼은 권위를 깍아 내릴 수 있다는 염려의 권위주의에 입각하여, 잘못된 판결을 들추지 않고 그대로 묵인 간과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
잘못을 묻어놓고 지나가자는 사법 권위주의의 피해는 국민 민중에게로 고스란히 전가되고, 민중은 사법 권력에 의해 이른바 ‘개돼지’ 취급을 받고 있다. 이 같은 풍토는 안창호의 황당한 개인적 믿음과 편견이 견제받지 않고 질주할 수 있는 온상을 제공해 왔다. 이것은 안창호 개인을 나무람으로써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일러준다.
안창호는, 원래 법이 개입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관계의 영역을 넘어서, 자연적 본능의, 내밀한 행위까지를 포괄적으로 규제하려 한다. 법의 범위를 넘어, 종교에서 권장하는 개인 행위 일체를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법 만능주의 신념을 주저없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한편에 법, 다른 편에 종교, 도덕의 영역을 서로 혼동하고, 법의 한계가 어디까지이며, 사회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개인 행위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인지, 그 한계에 대한 개념조차 갖지 못하고 있음을 노정한다. 그런데, 국가 권력 및 법이 개인의 사생활 위에 군림한다는 월권적 사고, 법 만능적 사고는, 안창호 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널려 있는 풍토를 반증하는 거울이다. 사실, 거기에 위정자, 민중이 딱히 따로 가는 것도 아니다.
한편, 권력과 법으로 타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규제라는 형식 자체가 목적일 뿐, 그 자체가 내용으로서의 선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안창호에게서 보이는바, 논리적 정합성을 결여한 법의 강요와 지배는 두 가지 속성을 갖는다. 첫째, 현실과 무관하게, 적어도 원론상 평등을 추구하는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동성애 등 어떤 특정의 차별금지법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모든 법을 반대하는 한편, 차별을 추구하는 모든 법을 강요하게 된다.
둘째, 차별법을 강요하는 지배자, 공직자, 위정자 등이 반드시 도덕성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안창호는 이번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거짓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공무상 해외 출장시 ”가족 동반 여부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답했다가, 후에 “배우자와 동반 사실 있다”고 말을 바꾸었다. 아들에게 아파트를 편법 증여했다는 의혹에서도 명쾌하지 못한 것으로 회자한다.
대통령을 국민투표로 뽑았더니, 민의를 대변하기는커녕, 한 사람이 지지해도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한다. 또 절차에 따라 누군가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했더니, 헌법 수호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 행위 자체를 포괄적, 근원적, 절대적으로 규제하려는 사법 권력 만능주의에 빠져있음을 보게 된다.
편견과 자기중심적 사고는 부득이한 인간의 한계이다. 다수가 모이면 어리석고, 소수는 현명한 그런 것이 도무지 아니다. 대중으로 모여 있든, 혹은 누가 대통령, 국회의원, 헌법재판관, 인권위 위원장 등으로 뽑히든, 그 속성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대중은 어리석은데, 소수가 되면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손에 권력이 집중될 때, 그 소수의 편견과 전횡이 다수를 억압하고 곤혹스럽게 할 뿐이다. 여기서 소수의 권력에 대한 국민 민중의 견제 장치, 또 권력 기구 상호 간 견제 장치를 갖출 필요가 생긴다.
편견과 독선의 안창호는 헌법재판관으로 봉직했다. 그 편견이 다소간 영향을 미쳤을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효과적 견제 장치는 현재로서 거의 전무하고, 국민 민중은 무방비로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 지금은 안창호 개인의 반인권적 극단 주장을 운운하고 탓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제2, 제3의 안창호이며, 혹은 그로 인한 피해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같이 일반재판소와 헌법재판소 간 상호 법리 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국 국회는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 재판소원의 '금지'를 '허용'으로 바꾸는 개정 입법을 서둘러야 하겠다.